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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상인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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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먼 미래, 대충 우주력 3360년쯤 이라고 해두자.
인류는 3천 년 전에 이미 하이퍼스페이스 (초공간) 의 비밀을 풀어 우주 공간을 초광속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인류는 전 은하로 놀랍게 빨리 퍼져 나가 정착을 했다.

한스 김은 페리옷 행성에 어머니, 누나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비교적 공부를 잘해 근처의 명문 콰하이 대학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이후 한 유통회사에 근무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러나 경기는 나빴고 회사 생활은 힘든 근무와 과중한 목표, 골치 아픈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월급은 쥐꼬리로 회사를 다녀야만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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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최근에 한스가 끈질기게 구애했던 아리아스가 부자집 남자와 약혼을 해버려 한스는 심사가 상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큰 누나 지나는 결혼한 지 3년이 됐는데 매형은 무기력한 회사원으로 역시 쪼들리는 생활을 했고 생활비를 보태려고 한스의 집에 와 같이 살고 있었다. 둘째 누나 하나는 어떤 건달 놈한테 빠져서 헤매고 있었는데 식구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 놈에게 매달려 사랑을 구걸하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온통 우울한 세상이었다. 가끔 멀리서 돈을 보내오는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은 그런대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날도 한스는 회사에서 과장에게 모욕적인 꾸중을 듣고 화가 치밀어 술집에 가 술을 먹고 늦게 집에 들어갔다.

뜻밖에도 한스를 기다리던 엄마가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엄마는 프린트된 종이를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
한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한스가 크고 난 이후 아버지는 몇 년에 한번 찾아올 뿐이었다. 매년 돈을 보내줬지만 액수도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에 올 때도 주로 밤에 왔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 버렸다. 엄마의 말로 처음에는 아버지가 우주를 돌아다니는 무역상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한스가 큰 이후에는 아버지가 사실 우주 공간을 떠돌아 다니는 한낱 행상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고달픈 몸을 이끌고 이 행성, 저 행성으로 보따리 짐을 팔러 다니는 행상. 한스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막연히 아버지가 그립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모든 것을 툭툭 털고 우주를 돌아다니는 방랑자. 차라리 나도 그 길로 나설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아버지의 메일은 뜻밖이었다. 아버지는 애절하게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이제 늙어 일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쓰고 한스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메일에는 우주선 티켓의 예약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메일을 읽고 난 한스가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험한 우주로 아들을 내보내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한스는 결심을 했다. 이 더러운 곳을 떠나리라. 아버지를 찾아가 우주를 떠도는 자유인이 되리라고 결심했다. 가족은 매형이 있으니 돌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나도 아버지와 함께 돈을 벌어 집에 부칠 것이다.

다음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은하 저편으로 가는 우주선 티켓을 보딩패쓰로 바꾸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날밤 아리아스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아리아스는 한스가 떠나던 말던 코방귀도 안뀌었다.

결국 한스는 페리옷 행성에 대한 울분 만을 품고 자우지란 행성을 향한 우주선에 올랐다. 셔틀이 땅을 박차고 오르자 페리옷 행성이 점차 원형을 띠며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왔던 나의 고향, 안녕, 이제 다시는 이곳에 못 올지도 모른다. 한스가 그토록 저주했던 페리옷이었건 만 막상 떠나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페리옷의 위성궤도에 떠있는 여객터미널은 매우 복잡했다. 한스가 탈 자우지란행 우주선은 매우 크고 많은 등급으로 나누어진 손님들을 태웠다. 한쪽에 남루하게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보며 한스는 그래도 비즈니스 티켓을 끊어준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비즈니스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한스의 옆으로 여승무원들이 지나갔다. 여승무원들을 흘깃거리던 한스는 그 중 2명의 여승무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들은 너무나 미인이었던 것이다. 늘씬한 키와 다리, 빵빵한 가슴과 엉덩이, 깨끗한 얼굴. 한스가 살며 보지 못했던 미녀들. 그녀들은 한스의 기대와는 달리 비즈니스 구역을 지나 특등석 구역으로 가버렸다. 제기랄, 역시 돈은 있고 봐야 하는구나. 한스는 커피를 들고오는 평범한 여승무원을 보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자우지란의 여객터미널에서 다시 문거래로 가는 우주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한스는 초공간 이동으로 피곤한 몸을 다른 우주선으로 옮겨 실었다. 이 우주선은 비즈니스도 없었다. 그냥 3등석에 쭈그리고 앉아 고통을 피하려 눈을 감았다.

문거래는 한산한 시골별이었다. 여객터미널도 조그맣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에 내려서 기다리면 사람이 찾아와 데려간다고 했다. 아버지는 저런 시골별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이곳은 페리옷보다 못한 곳인지 모른다. 여객터미널의 대합실에는 불량해 보이는 자들이 서성거렸다. 한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때 잘 차려 입은 건장한 남자가 한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한스 도련님이십니까?”
‘도련님?’, 이 자가 나보고 분명히 ‘도련님’ 이라고 했나. 한스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존칭에 놀라 그 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도련님을 모시고 오도록 아버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한스는 놀랐다. 아니 아버지한테 저런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 사람은 돈받고 일하는 심부름 센터 사람일 것이다. 한스는 그 사람을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여객터미널의 귀빈 구역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 안에는 두 사람이 더 기다리고 있다가 한스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스는 뭐가 잘못 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남자에게 자기는 한스 김이고 아버지는 바라크 김이라고 이야기했다. 한스는 흔한 이름이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갑자기 긴장된 자세를 취하더니 주위를 살피고는 한스에게 맞으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단호하고 엄격했는지 한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런 짐검사나 여권조회도 없이 한스는 계류장에 도착했다. 계류장에는 분명히 여객선이 아니고 군함으로 보이는 우주선이 있었다. 남자는 그 군함의 옆에 있는 날렵해 보이는 우주선으로 한스를 안내했다. 한스가 보니 최고급 소형 우주선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우주선. 한스는 그 안에 들어가 호사스러운 내부에 더욱 놀랐다. 더욱이 한스가 안내된 자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었다.

잠시후 옆의 군함이 먼저 우주로 떠오르고 이어 한스가 탄 우주선이 떠올랐다. 벽에 있는 대형 터미널을 통해 우주선 주변 상황이 종합적으로 파악되었는데 잠깐만 보아도 아까 그 군함은 한스가 탄 우주선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한스는 갑자기 빨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때부터의 여행은 그 동안의 여행 중 가장 힘든 것으로 변했다. 우주선은 무섭게 흔들렸고 가끔 중력장과 자기장의 강도가 높아지며 몸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가해졌다. 서너 시간 정도의 고통 끝에 마침내 정상비행으로 바뀌었다. 한스는 간신히 몸을 펴고 숨을 골았다.

멀리 작은 행성이 하나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도 여객터미널 (우주정거장) 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 가서야 그 별이 행성이 아니고 하나의 거대한 인공 행성임을 알았다. 행성에 가까이 가자 한쪽 벽이 열리고 한스의 우주선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계류장에 내린 한스는 다시 그들에게 안내되어 여러 개의 긴 통로를 따라갔다. 한스는 지나가며 이 행성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무지하게 많으며 남녀 모두 군인처럼 무장한 차림이라는 것을 의아하게 느꼈다. 한스는 마침내 마지막 문을 지나 아버지 앞으로 안내되었다.

방에 들어 선 한스는 다시 놀랐다. 으리으리하게 만들어진 집무실의 중앙에 엄청 높게 만들어진 책상 뒤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어마어마한 집무실 규모 때문에 아버지의 왜소한 체구가 더욱 작아보였다. 한스는 아버지의 앞에 가서 인사를 하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고생이 많았지.”
“아버지, 그런데 이 건 어떻게..”
“아비가 모든 걸 차근차근 이야기 해줄 테니 서둘지 말아라. 그래 네 엄마와 누나들 모두 건강하냐?”
“네.”

아버지는 더없이 인자하고 친근하게 한스를 배려했다. 한참동안 신변잡사를 묻던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한스에게 말했다.
“한스야, 너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냐?”
“네?”
“남자 대 남자로 너에게 묻는 거다. 이 아비가 딴 여자하고 놀아나면 너는 어떻게 할 거냐?”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스는 머리가 아팠다. 무슨 뜻인가. 아버지는 갑자기 공주님을 만나서 이런 지위에 올랐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이렇게 대단하게 살면서 집에는 겨우 쥐꼬리만한 돈을 보내 모든 식구가 그렇게 힘들게 살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갑자기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고민에 빠진 한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아버지가 엄마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남자가 딴 여자랑 놀아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냐?”
“네. 저도 결혼을 했다 해도 예쁜 여자가 있으면 같이 놀 것입니다. 다만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네 아비가 나쁜 일을 하고 있고 너에게 그 일을 같이 하자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아버지. 저는 너무 후달리며 살았습니다. 어떤 일이던 좀 큰 일을 뽐나게 하고 싶습니다. 비록 나쁜 일이라도. 나중에 좋은 일로 보답하면 조금은 속죄가 되겠지요.”

아버지는 조금은 곤혹스러운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좋다. 너는 나하고 같이 일을 하자. 이 아비가 진정으로 부탁하는 거다. 네 대답을 듣고 네가 내 제안을 수락한 것이라고 생각하겠다. 내일부터 아비랑 같이 일을 하고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가서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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